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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 역사교실 제2부 ④ 파주 장릉

입력 : 2016-08-31 17: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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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은 있지만 실리는 없던 외교, 인조

●문화재명: 파주 장릉 (사적 제203호)

 

 

성동리 장준하 공원에서 빠져나온 뒤 좌회전을 하여 장릉로 102번길을 따라 약 1km 정도 가면 파주 장릉 입구에 이른다. 파주 장릉은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왕릉이지만 시민들에게 오랫동안 비공개 유적이었다. 하지만 지난 6월부터 시범적으로 개방을 하고 있어 누구나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장릉의 주인공인 인조의 삶을 살펴보자.

 

광해군을 몰아내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농민의 세금을 감면해 주는 대동법을 실시하였고, 『동의보감』을 편찬하여 질병 치료에 노력하였으며, 파괴된 군사시설을 수리하였다. 그동안 오랑캐로 여기던 여진족이 후금을 건국하자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을 취하였다. 그러나 정국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그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시켰다. 이러한 실정은 반대파를 자극하였다.

 

“능양군 마마, 광해군이 자신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는 패륜을 저질렀습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준 명나라에 배은망덕한 외교를 펼치고 있습니다.”

 

능양군과 서인들은 광해군이 살제폐모(殺弟廢母,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위함)와 배명친금(背明親金, 명을 배신하고 후금과 친함)의 죄를 지었다며 정변을 일으켜 쫓아냈다. 이것이 인조반정이다(1623).

 

공산성으로 피란하다

반정에 성공한 능양군(인조)은 군왕의 자리에 올랐고, 서인들은 북인들을 정계에서 몰아내고 공훈을 나누어 가졌다. 그런데 큰 공을 세운 이괄은 2등 공신에 책봉되어 평안도 변경 지역으로 밀려났기에 불만이 컸다. 이괄은 자신의 아들이 반역죄인으로 몰리자 평안도 영변에서 휘하 군사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이괄의 난이다(1624).

 

“이괄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구나, 어찌하면 좋으냐?”

“전하, 우선 옥체를 보전하시옵소서.”

 

인조는 이괄의 군대가 개성까지 진격해 오자 공주 공산성으로 피란하였다. 이괄의 군대는 도성이 비어서 손쉽게 한양을 점령했지만 관군에게 크게 패하였다. 이천까지 도망을 쳤던 이괄은 부하들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었다.

 

강화도로 피란하다

이괄의 난을 운 좋게 진압한 인조와 서인 정권은 반정의 명분을 지키기 위해 명나라와 가깝게 지내고 후금을 배척하였다. 자극을 받은 후금은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며 3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이것이 정묘호란이다(1627).

 

인조와 서인 정권은 이번에는 강화도로 피신하여 화친을 꾀하였다. 후금 또한 명나라와 전쟁 중이라 화친을 선택하였다. 조선에 경고를 날리는 차원에서 공격했던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 후금은 형이고, 조선은 동생의 나라가 되었느니라.”

 

남한산성으로 피란하다

정묘호란 뒤 후금은 중국 본토까지 넘보며 조선에 더 많은 공물과 군신 관계의 수립을 요구하였다. 후금과 형제국이 된 것을 치욕으로 여기던 인조는 화의를 물리치는 교서를 발표하였다.

 

“후금과의 교류를 단절한다. 온 백성이 충성으로 원수에 대항한다면 무엇이 두렵겠는가?”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청 황제가 직접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으로 쳐들어왔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1636). 조선의 군대는 기병으로 구성된 청의 군대에 적수가 되지 못했다. 청의 군대가 개성을 함락하고 급히 한양까지 내려오자, 인조와 서인들은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다.

 

청 황제에게 무릎을 꿇다

인조와 서인들은 청군에게 포위된 채 남한산성에서 고립되었다. 인조는 식량이 떨어지고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항복하기 위해 45일 만에 성문을 나와 삼전도(서울 송파구 삼전동)에 이르렀다.

 

“그대가 항복을 하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도다!”

“황제 폐하, 천은이 망극합니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 의식을 치렀다.

 

사실, 인조는 국왕으로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집권 이후 세 번에 걸쳐 도성을 지키지 못했고, 명분만을 내세우고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두 번씩이나 국가를 위기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비운의 역사에서도 반면교사의 지혜를 얻을 수 있기에 장릉 개방과 더불어 인조의 삶을 되짚어 보았다.

 

 

 

글 정헌호(역사교육 전문가)

 

 

 

#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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